프로 토끼, 아마추어 거북이

 

학생 때 선행 학습이 열풍이었다. 어떤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인데 고등학교 때 보는 『수학의 정석』을 보고 있었다. 중학생 때는 특수 목적 고등학교(특목고)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SKY 대학에 가기 위해 진도를 미리 앞서 달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사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배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수능 점수가 높기를 바랐던 학교 수학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2학년 2학기 과목까지 가르쳤다. 한 시간에 『수학의 정석』 한 단원씩 쭉쭉 나갔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선행 학습을 하지 않았기에 수업을 따라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또 선생님은 잘 따라오리라 믿고 어려운 문제로만 구성된 쪽지 시험을 매일 치르게 하였다. 수행평가 진도, 모의고사 진도, 학교 내신(중간/기말고사) 진도, 거기에 만일 학원까지 다닌다면 학원 진도.. 갖가지 진도 속에서 개념을 이해할 시간은 부족했고, 나는 버티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팠다. 많이 아팠다. 자세한 것은 쓰기 싫을 정도로 아팠다. 세월이 많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고등학교 때의 꿈을 많이 꾼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꿈을 꾸듯이 매우 고통스럽고 인상 깊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닌가 싶다. 나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고 싶었지만, 주변은 모두 토끼처럼 달리라고 재촉했다.

 

 

수능에 실패하고 난 뒤, 나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내 안의 학문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학 때문에 그렇게 슬펐던 학생 때의 나였지만, 어른이 되어 대학 미적분학 책을 사서 스스로 공부를 하였다. 수학 진도 때문에 짓눌린 것일 뿐이지, 나는 수학 동아리에 들었을 정도로 수학을 좋아하였다. 아두이노를 접하고, HAM 이라는 보석과 같은 취미를 알게 되었다. 3D 프린터도 조립해서 이것저것 만들었다. 최근엔 레이저 각인에 관심이 생겼다. 프로 학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공학을 끝까지 사랑하는 아마추어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학으로 학자가 되는 일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마다 나는 이어령 박사님이 쓰신 『젊음의 탄생』을 읽는다. 그 책에 '바비 존스'라는 골프 천재를 소개하고 있다.

 

Golfer Bobby Jones (1931)

 

 

바비 존스는 골프 천재였고, 당시 그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기록은 아직도 깬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그는 은퇴하는 날까지 아마추어 골퍼로 활동했다. 큰돈을 벌 수 있는데 왜 프로로 전향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골프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골프를 너무나 사랑하기 따라서 만약 그것이 돈을 버는 수단으로써의 직업이 된다면 더 이상 골프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어령 박사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셨다.

 

"돈이 목적이 아닌 순수한 사랑 그것이 사랑의 아마추어가 아닙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학문에 있어서도 수단으로서의 프로페셔널이 된다면 거기에서 창조적인 가치가 태어나기는 힘들다는 점입니다. 역시 배움의 희열, 학문의 즐거움은 그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열정에서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학문이 직업이 되어버린 프로 학자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그레이트 아마추어'란 말이 조금씩 퍼져가고 있습니다." (259p)

 

 

그레이트(great)까진 못 되더라도 굿(good), 좋은 아마추어는 되고 싶다는 생각이다. 꾸준히 배움을 즐거워하며 지(知)와 호(好)를 넘어선 낙지자(樂之者)가 되기를 소망한다. 공부를 아는 것(知)에서 그치지 않고, 좋아하는 것(好)을 넘어 즐기는 단계(樂)까지 나아가고 싶다.

 

 

 

당시 고등학교 때 아팠던 나를 안타깝게 여기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각난다.

 

"토끼가 이기는 것 같아 보이지? 아냐, 거북이가 결국 이겨. 네가 느려서 잘 못하는 것 같아도, 끝까지 해봐. 수능? 못 봐도 좋아.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추구해 봐. 느려도 돼."

 

 

솔직히 엔지니어로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밥만 먹고 그것만 하는 사람인데 무슨 수로 따라잡겠는가. 하지만 공학을 꾸준히 즐기는 것으로는 내 위치가 직업(job)으로서 공학하는 사람보다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감일과 성과에 쫓기며 때로는 번아웃을 경험하지만, 나는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공학을 탐구할 수 있다.

 

 

잘하는 사람, 토끼 같은 사람이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토끼보다는,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우직하고 꾸준하게 걸어가는 것이 정서적으로 나에겐 맞다. 적어도 토끼처럼 안일한 마음과, 번아웃으로 잠을 자버리는 일은 없다. 거북이처럼 끝까지 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하자. 느려도 좋다. 나의 속도에 맞게 천천히, 꾸준히 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