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비인간 길들이기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 이 글은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를 읽고 쓴 글입니다.

 

Q. 인간이 만든 비인간을 길들이기 위한 방법?

 

무섭지만 길들여야 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우선 우리가 만든 비인간으로부터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에 대해 후회하여 방기하고, 이 일로 인해 괴물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프랑켄슈타인이 죽고, 나중엔 괴물도 죽는다. 비인간을 만든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할 수 있다. 마치 AI가 없었던 세상이 더 좋았다, 원자폭탄이 없었던 세상이 더 좋았다, 하며 인간이 만든 비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만들어진 비인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지만 행위자이며, 우리가 만든 자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비인간은 세상과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만든 비인간에 대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부터 도망가는 행동처럼 책임을 버리지 말고, 이 비인간이 세상과 어떻게 잘 어울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의 내용과 같이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미국의 소아백신과 자폐증에 대한 논의

 

이를 위해서 책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겨루기 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소아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논쟁이 크게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백신이 자폐를 유발하지 않고 자폐는 유전적인 요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부모들과 반대 급부에 있는 전문가들은 백신이 분명 자폐를 유발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이 논쟁을 위해 미국에서는 백신법정이라는 제도를 강구했고, 이를 통해 공식적인 논의의 장이 마련되었다. 결국 백신이 자폐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옳다는 판결이 났지만, 이러한 백신이라는 비인간에 대한 사회 속 역할 규정, 이를 위한 논의의 장을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겠다. 비인간은 이렇게 인간들의 수많은 논의를 통해 길들여진다.

 

 

Q. 비인간이 사회와 상호작용을 할 때 과학기술자의 역할은?

 

예상치 못했던 과속방지턱의 부작용

 

비인간은 또 다른 행위자다. 그렇기 때문에 비인간이 사회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역할을 할지에 대해서는 예상치 못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과속방지턱은 길바닥에 있는 경찰이라고 부른다. 과속방지턱 덕분에 과속으로 인한 사고가 실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과속방지턱은 앰뷸런스, 소방차 등 긴급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차들에게 많은 방해가 된다. 안전벨트 또한 그렇다. 안전벨트를 매어서 교통사고로부터 인간의 안전을 지킨다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안전벨트를 착용해야 하는 법규가 교통사고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진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안전벨트를 맸으니깐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부주의하게 운전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인간은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사회와의 수많은 네트워크를 통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최초의 핵 폭발 (트리니티 실험)

 

이러한 비인간들이 사회와 상호작용 하는데 있어서 과학기술자가 그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일단 비인간은 과학기술자에 의해 1차적으로 만들어졌다. 과학기술자는 자신이 만든 비인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인간이 사회에 길들여지는 과정 중에서 중요한 의견을 내야 할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이와 달리 과학기술자는 자신의 연구가 사회에서 어떻게 쓰이는 것에 대해 책임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의견도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투입된 파인먼이 폰 노이만에게 그러한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핵을 연구하고 만든 집단이 핵이 정치, 군사목적으로 쓰이는 즉, 우리 사회 속에서 파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에 대해 도덕적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일까.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 로버트 윌슨, 실라르드와 시카고 과학자들이 반핵운동에 앞장섰다는 것은 과학기술자로서 사회에 어떠한 책임의식을 갖고 행동을 해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Q. 앞으로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야 하는가?

 

지금은 뉴턴이 아닌 아인슈타인의 법칙으로 중력을 이해한다 (출처: 동아사이언스)

 

사실 과학은 신의 얼굴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은 수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자연을 갖고 놀기 쉽게 만든 것이며, 모델화 시킨 것이다. 과학적 논쟁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연법칙 모델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네트워크 집단이 얼마나 강하고 끈끈하냐를 겨룬 끝에 논쟁이 종료되고 과학적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것이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은 수많은 과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철학자와 같은 지식인들과의 치열한 논쟁 끝에 이루어진 결과물이지 그것은 처음부터 보편적 진리라고 일컬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현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논의의 과정을 건너뛰고 과학기술의 결과만 가져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과학기술이 만들어지는 논의의 과정은 생각보다 길고, 과학기술연구는 생각보다 실패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기술이 결과로서만, 가져와서 쓰는, 도구적인 것으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의 연구가 긴 시간을 두고 실패를 포용하며 이루어져야 한다는 속성을 무시하고 경제적 낭비라고 생각하며, 장기적인 과정보다는 단기적인 성공이라는 결과에 집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돈이 되는 연구, 단기적, 가시적인 연구에 대한 지원만 고려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과학기술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과학기술학을 통한 메타적 관점이 필요하다.

 

유럽연합 인공지능 법

 

또한, 앞서 보았듯이 서양에서는 과학기술이 만든 비인간(백신, 핵 등)에 대해서 지지고 볶는 과정이 존재하였다. 과학기술이 만든 비인간은 사회와 끝없는 네트워크 과정이 이루어진다. 비인간을 길들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올바르게 자리잡게하는 작업은 쉽지 않으며 집단지성과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이것은 과학기술자뿐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비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학기술학 연구자 브뤼노 라투르

 

자연법칙은 발견이 아닌 인간의 창조과정이다. 새로운 시각과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 자체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과의 융합적인 사고과정과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배우고 구현하는 기술이 사회에서 어떤 상호작용과 네트워크를 이루어갈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만들기만 했다) 이 책을 통해서 앞으로 융합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다른 과학기술학 책이나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의 도서들을 읽고 탐구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조각가 전뢰진 작품 <무제, 1980>

 

내가 만들 비인간은 사(死)물체가 아닌 행위자(Actor)다. 그것을 명심하자.